시간의 두 증명 - 모순과 순리

2023년 03월 24일 - 2023년 05월 28일
서울대학교미술관 전관

고유시간(Eigenzeit)으로 나아가기

새로운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의 결과는 ‘고유시간(Eigenzeit)’의 소멸로 이어집니다. 삶의 경험을 통해 포착되는 시간, 아동기, 청소년기, 성년기, 노년기,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애의 특정 시기와 관련된 시간입니다. 새것, 새로운 느낌, 새로운 인식에 대한 집착과 고유시간의 소멸은 상호 변증적 관계입니다. 새것에 집착할수록 시간의 측면에선 더 빈곤해지고, 시간적으로 빈곤할수록 더 새것에 집착합니다. 이 과정이 진행될수록 이미 존재하는 것, 발견된 것에 담긴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 의미를 숙고하지 못하게 됩니다. 새것은 생산경제 측면에선 축복이지만, 오늘날 예술을 이토록 빈곤한 것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나에게는 그러한 욕망을 가질만한 재능이 없는 것이 오히려 커다란 은혜”라 했던 이유입니다.

권태에 대해서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과거의 것이라 싫증 나는 것이 아닙니다. 싫증은 오직 새것에 대해서만 날 뿐 옛것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옳습니다. “옛것은 행복으로 배부르게 해주는 일용할 양식이다. 옛것은 행복을 준다.” 일용할 양식은 순식간에 빛이 발하고 마는 매력은 없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전통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들은 ‘길’과도 같은 것입니다. 길은 싫증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같은 길을 걸을수록 오히려 정겹습니다. 길은 반복을 지겨워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매번 모르는 길로가는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다만 우리가 새로움, 매력, 흥분, 오락에 취해 있을 뿐입니다. 이 시대의 상품경제의 강제에 짓눌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만병통치약 같은 것으로, 즉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정에서 오는 불행을 완화하는 진정제로 사용하는 것은 망각보다 더 해롭습니다. 그런 용도라면 과거를 소환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런 과거는 상상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서울대학교미술관의 협력 전시인 《시간의 두 증명 – 모순과 순리》는 의식주에 녹아있는 우리의 전통, 가치관과 지혜에서 오늘날의 삶과 예술, 더 나아가 문명의 길을 밝힐 영감을 구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현재라는 동굴에서 빛으로 나아오기 위해 과거로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이 두 기관의 일치하는 공명 경험이었기에 가능한 협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흥미진진한 시간 여행을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같은 유서 깊은 기관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하며, 귀한 조언과 협력을 아끼지 않으신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신연균 이사장님을 비롯한 학예연구원들,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여정에 함께 해주신 참여작가분들께도 같은 마음입니다. 저희 미술관의 학예연구팀과 행정부서의 직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심상용
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전시부문: 회화, 영상, 조각 등 170여 점
참여작가: 강소청, 권대섭, 권창남, 김미라, 김보민, 김성철, 김수자, 김용회, 김일웅, 김태호, 다발킴, 류성실, 문영민, 문혜진, 박서희, 박성철, 박진아, 백남준, 서도호, 서용선, 신경균, 심현석, 양유완, 양혜규, 여병욱, 오지은, 우덕하, 유희송, 윤석남, 이강연, 이강효, 이건민, 이경선, 이경아, 이성자, 이수경, 이윤신, 이은범, 이인선, 이인진, 이종상, 이준호, 장욱진, 정유리, 정은미, 정재호, 정재효, 조덕현, 조재량, 조창근, 조해리, 최지광, 하동철, 한정용, 허상욱, 황갑순